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프라하 얀 후스의 흔적을 따라서
    유럽 자동차여행/체코 2023. 8. 24. 06:00
    728x90

    유럽을 여행하면서 좋았던 점은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그곳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하며 책을 많이 읽게 되고 책으로 알게 된 곳을 직접 가 보면서 이해가 되는

    책과 여행의 선순환 

    얀 후스도 그런 인물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프라하를 가기전에는 누구인지 아마 들었던 적이 있었지만 잊어버렸을 그런 인물.

     

    이번에 프라하를 가서 얀 후스에 대해 알게 되며 그 분의 흔적을 따라가보며 믿음의 선배에 대해 더 알게 된 것이

    그 역사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좋았었는데요. 

    마틴 루터보다 100년 전에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고 부폐한 가톨릭을 비판했던 얀 후스에 대해서는 나무위키에서 퍼와 봤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그는 수많은 설교와 강연, 저술 활동을 통해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며, 초대 교회의 순수한 열정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청렴하고 순수한 교회, 재물과 부패에 찌들지 않은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가난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는 계속해서 농민계몽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에 저항했고, 성경 존 위클리프[7]의 저서를 체코어로 번역하여 보헤미아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사치를 부리며 아비뇽 유수 이후로 분열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이 명시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성체성사에서 평신도 포도주(성혈)를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가톨릭 성체성사에서 포도주는 사제만 마실 수 있었는데[8], 얀 후스는 성경에 근거하여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주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체코 개신교의 상징이 성찬용 잔(chalice, 성작)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403년에 얀 후스의 후임으로 독일인 발터 하라서(Walter Harasser)가 선출되어 위클리프파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에 얀 후스는 직접적인 대응을 하는 대신 대학 강의 및 베들레헴 예배당[9]에서 계속 설론을 강행하였다. 또한 대주교 즈비네크 자이츠(Zbyněk Zajíc) 또한 그에게 호의적이었기에, 그는 한동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409년을 기준으로 교회통합이 시작되었고, 이 때문에 대주교의 지지도 철회되었다. 결국 후스는 대립교황 요한 23세[10]에 의해 파문당하고 이후에는 공개적 강론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교황청은 얀 후스에게, 분열된 교황청의 통합을 위해 열리는 1414년 10월에 열리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공의회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교황청의 함정이라고 판단하여 초기에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이단 처분을 철회하고 독일왕이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11]가 얀 후스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약속을 믿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할 마음이었다.

    그러나 교황청이 분열되었던 당시에는 주장이 용납되었을지 몰라도, 교회의 통합이 선언되는 시점에서 얀 후스는 방치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었다. 1414년 11월 3일 콘스탄츠에 도착한 얀 후스는, 11월 28일에 공개적 강론을 금지한 교회의 처분을 무시하였다는 빌미로 체포되었다.[12] 후스를 체포한 가톨릭 교회는 왜곡되고 조작된 증거들을 이유로 그를 이단자로 간주하고 감금하였다. 감옥은 환경이 매우 나빠 건강을 해쳤는데, 그 상황에서 후스는 자신을 변호할만한 자료나 증인조차 모으지 못하며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자신을 변호해야했다.[13] 이후 상황이 조금 나아진 장소에서 가톨릭 교회는 합의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후스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1415년 7월 6일, 얀 후스는 "혐의를 인정하고 종신금고형의 처분을 받던가 아니면 이단자로서 성직을 박탈당하고 세속 당국의 처분(=사형)을 당할 것인지 선택하라"는 통고를 받았다. 얀 후스는 자신의 발언이 왜곡되었다는 이유로 혐의가 무고하다고 주장했으나, 검찰관 주교는 이를 기각했다. 결국 후스는 모든 혐의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검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예수 그리스도여, 나의 적을 1명도 남김 없이 용서해주소서. 당신께서는 위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계시니 나는 중재를 원합니다. 당신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적들은 거짓말로 나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위증인을 데려왔습니다. 당신의 위대한 자비로 이 사람들을 용서해주소서.
    이단자의 판결이 나자 성직 박탈 의식이 행해졌다. 의식이 시작되기 전, 다시 "이단적 의견을 철회하겠느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얀 후스는 이렇게 답변한다. "이단설로 지적된 내용 중 일부 내용은 전혀 짚이는 바가 없고, 다른 연설 또한 비판을 위해 인용한 것이지 내 생각은 아니다." 이에 성직자들은 후스에게 단 위로 올라가라고 명한 뒤 다시 성작과 성반을 들라고 명했다. 이 시점에서 다시 "그릇된 언설을 철회하겠느냐?" 는 질문이 이어졌으나 후스는 다시 철회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저 사람들의 구원을 귀중하게 여긴다.
    이에 주교들은 호통을 치며 성작과 성반을 빼앗은 뒤, 사제복을 찢어벗겨냈다. 이후 머리카락을 잘라내야했는데 이 과정에서 가위로 자를 것인지 면도날로 밀 것인지 사소한 논쟁이 생겼다. 이에 후스는 지기스문트에게 "주교님들께서 하느님을 어떻게 모독할지 의견이 맞지 않는 모양입니다"라며 유머러스한 발언을 남겼다. 결국 면도날을 쓰기로 결정했고, 후스의 머리카락을 4갈래 방향으로 밀어버림으로서 성직 박탈 의식이 종료되었다. 의식이 종료된 직후 주교들이 "얀 후스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긴다"고 발언하자, 후스는 "가장 성스러운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영혼을 맡긴다"고 받아쳤다.

    이후 후스에게 "Hic est Heresiarcha(이 사람은 이단의 우두머리다)"라고 쓰여진 종이 모자가 씌워졌고, 그 상태로 "죽이지 말고 오랫동안 감옥에 가둬달라"라는 말을 남기며[14] 지기스문트에게 처분을 넘겼다. 지기스문트는 안전보장을 한 인물을 직접 죽이기를 꺼린 탓에, 최종처분을 측근이자 콘스탄츠의 관할자인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에게 넘겼다. 루트비히 3세는 콘스탄츠 시장에게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죽은 장소는 정확하지 않지만 콘스탄츠 성 서쪽, 성벽과 수로 사이에 있는 곳으로 전해진다. 그곳에서 그는 장작더미 속에서 밧줄로 묶였고 목은 쇠사슬로 묶였다. 묶인 그는 시편 21편과 51편을 낭독했다. 낭독하는 동안 종이 모자가 떨어지자, 형리가 그것을 도로 씌우고 후스에게 일어나라고 명했다. 후스는 간신히 일어나면서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여! 나는 당신의 복음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인내력을 갖고 즐거이 이 두렵고 수치스럽고 잔학한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집행의 시간이 오자 형리가 죄를 자백하라고 했지만 그는 거부한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것은 모든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나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내가 나의 입술로 전파한 것을 이제 나의 피로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기스문트의 연락을 받은 루트비히 3세가 "혐의를 인정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 역시 거부한다.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신다. 나에 대해 위증한 거짓 증인들이 말한 모든 죄목들을 나는 전파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의 설교들, 저서들에 나타난 나의 원리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복음에 대해 거룩한 박사들이 가르치고 해설한 그대로 나는 썼고, 가르쳤으며, 전파했다. 나는 오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때 얀 후스는 "오늘 당신들은 1마리의 거위(Husa)를 태우지만, 당신들이 태우지 못할 백조 1마리가 나타날 것이다(Dnes pečete hus, ale přijde labuť, kterou nebudete moci upéci)." 라는 유언을 남긴다.[15]

    이에 루트비히 3세는 뒤로 물러서 박수를 쳐 처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형리가 불을 붙였고,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후스를 태우는 화형대에 장작 한 더미를 가져오는 것을 보고, 라틴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전한다.
    O sancta simplicitas(오 거룩한 단순함이여)!
    불이 옮겨붙자 후스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처녀 마리아에게 태어나"라고 부를 즈음 불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럼에도 후스는 입술을 움직였으나, 그 말이 무엇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화형 집행이 종료되자, 형리는 이단자의 유해나 유품이 추종자들의 상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관례적인 조치에 따라 옷도 마저 불태우고, 남은 잿더미와 땅까지 긁어 라인강에 내다버렸다.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58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일어난 후스의 처형에 대해 현대의 역사가는 이렇게 요약한다.
    교회의 쇄신이야말로 프라하의 교수 얀 후스Jan Hus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이었다. 요한 23세 폐위 후 심의 휴지기에 공의회는 후스라는 인물과 그 가르침에 대해 논의했다. 1415년 5월 5일 그의 45개 명제들이 단죄된 잉글랜드인 위클리프Wycliffe는 후스의 모범이었다. 후스도 위클리프처럼, 범죄로 점철된 작금의 교회를 떠나 하느님께 (구원을) 예정받은 자들이 모인 영靈(Pneuma)의 교회로 도피했다. 거기서 사제직과 성사의 질료적 집전이 아니라 오직 영의 소유가 구원을 보장한다. 스스로 흠 없었던 그는, 성직자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그의 보호자였던 프라하 대주교마저 격분시켰으나, 귀족과 체코 국민들로부터는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공의회는 그에 대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려야 했다. 지그스문트 왕은 그에게 콘스탄츠 행 통행증을 교부했다. 그에게 내려진 교회의 파문은 철회되었으나 성무집행정지 ― 미사 집전과 설교의 금지 ―는 철회되지 않았다. 콘스탄츠에서 후스는 이 금지를 어겼고, 구금되었다. 공의회가 임명한 예심 판사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기를 거부했다. "나는 어떠한 오류도 가르치지 않았다. 체코 인치고 이단자는 없다." 그는 1415년 7월 6일 골수 이단자로 단죄되어, 현행법에 따라 세속 기관이 처형했다. 1년 후, 친구였던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16]도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주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 후스는 의연했다. 형집행을 목도한 인문주의자 포지오Poggio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 문제만 빼면 ― 그는 탁월한 사람이다"(Vir Praeter fidem egregius)

    후베르트 예딘, 《세계공의회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안드레아 신부(몬시뇰)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84-85쪽

    얀 후스의 교회

    얀 후스가 설교하였을 자리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한국어 설명도 있었습니다.

    얀후스의 재판모습

    그리고 그 시대의 프라하의 지도도 보실 수 있습니다.

    프라하 광장에 있는 저 동상이 얀후스의 동상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네요.

    프라하에서는 카프카와 얀 후스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책으로 읽은 것 보다 이렇게 보고 오니 더욱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프라하를 가신다면 얀 후스 교회도 가 보시길요~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