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짐을 싸서 택시를 타고 아들과 시댁에 도착을 해서 전화로 시어머니를 내려오시라고 하고는 아파트 입구에 나오신 시어머니를 확인하고 아들을 택시에서 내리라고 하고 그 옆에 가방을 놓고 시어머니가 오셔서 아이를 안으시는 것을 보고는 택시의 문을 닫고 그대로 공항으로 향했던 날.
그렇게 5살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갔었습니다.
아들이 6개월때 부터 시작되었던 전 남편의 외도. 하지만 이혼을 하겠다고 할때마다 "만약 이혼을 하면 두번 다시 니 아들은 못보게 할 줄 알아" 라던 협박이 무서워서 참고 살고 있던 시간들...
그러다 희귀병으로 쓰러져서 정말 죽기직전까지 갔다가 2달 넘게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나와서 세번째 상간녀에 대해 알게 되었을때 이혼을 하자고 하면 아이는 안 줄것이니 혼자 한번 키워보면 힘들어서라도 이혼할때 아이는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아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돌아오기에는 몸이 너무 아파 그럴 수 있는 몸이 아니어서 더욱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혼을 생각하니 영주권 주 신청자인 전남편에게서 분리되어서 캐나다 비자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일이 시민권을 따는 일이었기에 캐나다에서 6개월만 더 살면 시민권 신청이 가능한 그 시기를 놓칠 수가 없어서 이기도 했었네요.
그렇게 혼자 캐나다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살던, 아들의 짐이 다 있는 그곳에 혼자 들어가서 산다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너무 아팠고 병원 근처에 살아야 했기에 혼자 여러사람이 함께 쓰는 공간에 월세로 들어갔습니다. 집을 나간 나에게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었던 전남편 덕에 카드도 없던 시절. 친정엄마가 주신 돈으로 얼마나 살아야 할지를 몰랐었기에 방 하나를 온전히 빌리는 것도 너무 비싸서 한 방에 이층침대가 있어서 침대 하나를 빌려서 나머지 공간은 낯선 이들과 함께 쓰며 살아야 하는 그런 곳을 빌려서 살았습니다.
어차피 요양을 했어야 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나 교회와 병원을 가는 것 밖에 못하던 시간들.
아들이 보고 싶어서 죽을것 같이 힘들었던 마음은 이혼하고 내가 데려와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는 희망의 계획들로 채우며 버티고 있던 시간들. 그러다 친정엄마의 전화 한 통에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보러 유치원에 갔는데 박서방이 우리한테 아이를 보여주지 말라고 했다고 하며 아이를 안 보여줘..."
하시며 펑펑 우시는 엄마의 목소리에 ' 아... 이 사람이 이혼을 해도 내게 아이를 안 주겠다고 하면 어떻하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는 같이 살아봐서 아는데... 아이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 잘 아는데 아직은 한국이, 시댁이 낯설 아들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익숙한 외할머니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과연 이혼할때 아이를 내게 줄까?
아들을 안보고 나는 살 수 있을까?
전남편이 원하는 것이 나의 시민권이라는 것을 알아서 이미 캐나다 영주권의 유지자격을 상실한 남편이 캐나다로 올 수 있는 방법은 나의 시민권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서 이를 악물고 시민권을 받을때 까지 혼자 버텼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참 많이도 가졌었네요.
주님앞에 무릎꿇고 눈물로 기도하던 그 시간들에 저를 위로 하는 것은 성경말씀들 이었지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희귀병이라 무리하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안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내가 혼자 이혼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돈을 벌면서 생활을 하는 것이 좋을 지 아님 다 용서하고 다시 전남편과 재결합 하는 것이 나을지를 두고 고민을 하다보니 아이만 생각하면 결정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어려서 엄마도 필요하고 아빠도 찾을 나이....
그렇게 재결합을 결정하고 이런 일을 벌인건 나의 잘못이라는 남편의 적반하장을 다 받아들이며 남편이 하라는 대로 다 한다고 하고 나서야 친정엄마는 제 아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재산은 남편의 명의로 하고 내 명의로는 통장이나 카드 하나 만들지 않는 다는 조건. 그리고 이제 시민권을 땄으니 한국에 들어와서 사는 조건. 아들만 보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무슨 조건이든 겁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남들은 다 이제 아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나올 시기에 왜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짐을 싸서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었네요.
가끔 이혼을 하며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없었다고 우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토닥거려주며 이야기합니다.
"괜찮아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요. 그리고 아이를 위해서 열심히 돈 벌어서 아이가 엄마를 찾을 때, 애가 원할때 다시 애를 데리고 올 수 있을 만큼의 준비를 해요."
이혼을 하기 전에 고민하는 상태인 엄마에게는 이렇게 이야기 해 줍니다.
"내가 뭘 하고 살 수 있을 지 잘 생각하고 결정하세요. 아이를 안 보고도 살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그게 아니면 참고 살면서 그 다음을 준비할 수도 있어요. 내가 먼저인지 아이가 먼저 인지 결정해요."
남편의 폭언과 폭행에 같이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하지만 시댁이 부자라서 아이는 놓고 혼자 나오겠다는 엄마한테는 이렇게도 이야기 해 주었었네요.
" 그 돈 많은 시댁이 길러낸 아들이 당신 남편인데... 거기에 아들 놓고 나온다고 잘 키워주겠어요? 아이는 돈만으로 키우는 게 아니어요... "
그 힘들었던 시간 다 보내고 지금은 21살의 아들이 옆에 있다보니 다시 돌아가도 그런 선택을 하겠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저는 "네" 입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희생했던 내 젊음은 아깝지 않은 듯요... 그리고 정말 죽을 듯이 힘들었던 그 시절도 또 살아내 지더라구요... 그리고 돌아보며 괜찮았다 이야기 하는 날도 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