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세월호의 아이들을 기억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 2015. 4. 16. 06:00
    728x90

    작년 오늘...  4월 16일...

    그날의 일들은 그냥 스쳐가는 기억의 편린만으로도 제 가슴이 이렇게 찢어지는데...

    그일로 자식을 더 차디찬 바다에 묻으신 부모님들의 심정은 어떨지...  상상이 안 갑니다..

    그때의 일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그 뒤로 벌어진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렵고 이해는 더 안되었던 일 처리와 벌어지는 일들이...

     

    저의 글쓰기가 제 마음을 다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하여서..

    제가 평소에 참 좋아하는  권성민군의 글로 제 마음을 대신 하고 싶습니다.

    권성민군 블로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http://blog.cyworld.com/miracleofgiving

     

    어릴 적 잠자리를 잡던 기억은 늘 설레던 한 조각이다. 벌레를 유난히도 소름끼쳐했던 터라 드물게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곤충이었다. 날개를 붙잡고 있으면 이리저리 꼬물대는 모습이 징그러우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흥분이었다. 그런데 한 녀석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손가락을 튕겨 잠자리 머리를 때렸다. 여러 차례, 그것도 경쾌한 기합성과 함께. 작은 머리는 날아갔고, 머리 없는 몸이 꼬물거리는 모습을 즐거워하는 듯 했다. 눈앞이 아득했다. 도대체 왜, 저게 즐거운 걸까.

    10대의 끝자락에 가치의 문제에 사로잡혔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할까. 꽤 많이 읽고 머리를 쓰고 기도도 해봤지만 잘 모르겠더라. 속편하게 타협을 했다. 뭐가 정말 옳은 건지 알기는 힘들어도,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건 좀 쉽지 않을까. 적어도 잠자리 머리를 날리며 노는 건 하지말자고 말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런 것만 따라다니며 살아도 인생은 충분히 짧지 않은가....

    도피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국제사회의 문제들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절대빈곤의 문제들은 명확해 보였다. 분배냐 성장이냐는 아무리 싸워도 끝이 안 날 것 같지만, 적어도 온 세상이 다 신기할 아이들이 깨끗한 물 한 줌이 없어 죽어간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그것마저 쌍지팡이 짚고 나서 말리는 이가 있다면, 당신이 틀렸다고 분명하게 말할 자신이 생겼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구조의 문제를 공부할수록 무력함에 짓눌렸지만, 그래도 당장 한 마을의 아이들을 살리는 것은 훨씬 간단한 문제였다. 교회의 친구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여러 NGO 실무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워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고 도서관을 지었다. 그건 그 자체로 만져지는 보람이었다. 아니다 싶은 것들만 고민하며 살기로 한 것처럼, 눈앞에 할 수 있는 것들만 하나씩 해나가면 어딘가 도착하겠지 생각했다.

    그랬다. 정말 아니다 싶은 것, 그리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 생각하자니 결국 내가 사는 곳은 이 나라였다.

    1년 전 이맘 때, 세월호 사건 이후로 모든 예능프로그램이 잠시 멈췄다. 예능PD들에게 일주일의 휴식을 뜻하는 결방은 이유를 막론하고 제일가는 낭보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쉴 수가 없었다. 안산을 찾아 자원봉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미 꽉 찬 명단에 내 순서는 요원해보였지만, 곧 순서가 돌아왔어도 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가 누구보다 먼저 예능프로 방영의 재개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느끼는 무게는 다른 법이니, 누군가에게는 웃음이 필요할 수도 있으리라. 슬픔의 동참은 선택이지 분명 강요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방영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결방이 결정되기 전 이미 완성되어 있던 방송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었다. 행여 사고와 연관되어 보일 수 있는 장면이 있는지가 확인의 대상이었다. 작업물을 재생하며 설마 그런 게 있을까 했던 얼굴은 금세 굳었다. 그날따라 무슨 ‘물’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는 장면의 실상 별 상관없는 자막들도 몹시 거슬렸다. 대대적인 수정작업을 거쳤다. 사실 그런 사소한 장면들에 마음이 상할 만한 사람들은 아예 예능을 틀지 않았을게다. 당사자들에게 보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최소한의 예의고, 그 와중에도 웃음을 만들어 송출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지막 도리였다.

    그런데 갈수록,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이 이어진다. 조금이라도 사고가 연상될까 노심초사 했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놓고 놀잇감 삼으며 당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고통 앞에 온갖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나는 아직도, 정부가 일부러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무능했을지는 몰라도, 그 미숙함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토록 말도 안되는 잔인함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이 사고를 가지고 정권에 대한 가부 자체를 논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이건 아니지 않은가. 곳곳에서 잠자리 머리가 날아간다. 그들의 머리를 날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저 비극의 정확한 경위와 1년째 바다 아래 수장되어 있는 아이들의 시신을 바란다는 목소리에, 왜 자꾸 저열한 정치와 돈을 덮고 싶어 한단 말인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어째서 한쪽의 입장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지겹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자기 일이라고 생각해보라는 말은 무력하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니다. 그 슬픔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슬프지 않을 수 있다. 한때는 마음 아팠어도, 이제는 무던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에겐 가식이라는 것이 있고, 위선이라는 것이 있다. 위선을 비꼬는 사람들은, 사람이 본디 선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선한 행동들을 거짓이라는 이유로 비웃는다. 하지만 사람이 선하지 않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진심이 아닌 행동을 비웃는다면, 사람은 그 어떤 선함도 추구할 수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마음에 없이 했더라도 선한 행동을 지지하고 싶다. 슬프지 않더라도 위로를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 설령 잘 보이고 싶어 한 행동이라면, 잘 봐주면 또 어떠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낸 것을.

    가식과 위선의 착함조차 절실한 세상이다. 적어도 이건 아니라고 말할 일들이 넘쳐나고 있다. 세월호 1주기를 앞두고 많은 단체들이 여러 이야기들을 준비하고 있다. 10여 분의 영상이라도 눈에 띄면 봐주고, 모이는 자리에 사소한 발걸음 한 번을 들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무력함을 느끼더라도 당장 눈앞의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간다면, 분명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권성민군 페북에서 퍼온 글입니다.

     

    안산 합동 분향소에 찾아간 날,
    헌화를 하고
    아이들 하나 하나의 영정을 보며
    고개가 떨구어지던 기억이 납니다.

    분향소 출구에는
    떠나는 영혼들에게 띄우는 말을
    적을 수 있는 처연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습니다.

    "주여 이 고운 영혼을 평안히 거두소서"
    아마 희생자 아이가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이 쓰신 듯한 글귀들이
    이따금씩 눈에 띄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외람될 수 있지만
    참으로 무력해지는 참담한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곳이어야 합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여전히 원통함이 넘치고 있지만
    발을 딛고 사는 이곳에
    정말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고통 받는 이에게 손을 내밀고
    불의한 일들이 떳떳할 수 없도록
    기도하는 무릎을 일으켜 직접 걸어가야 합니다.

    어떤 교회들에서
    세월호를 말하는 것을 마치
    건강하지 못한 일처럼 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예수님은
    누구보다 먼저 팽목항에 달려가시고
    유가족들의 눈물을 가슴에 묻으실 분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죽음' 뿐 아니라
    맨몸으로 모든 이를 만나셨던 그 분의 '삶'까지
    부디 되새기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가 부활절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예쁜 달걀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 분의 삶을 여기에 다시 살아내는 사람들로
    예수님의 부활이 드러나길 바랍니다.
    .

    아멘.....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