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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엔나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만난 모네와 피카소
    유럽 자동차여행/오스트리아 2023. 5.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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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나에 미술관과 박물관 궁이 많아서 몇개만 선택해서 열심히 봤었는데요.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모네와 피카소를 만나서 좋았습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건물만으로도 멋지니까 꼭 가보시길요~

    모네와 피카소전을 하고 있어서 기념샷~

    저도 이 그림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요.

    이 그림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인상적인 소년은 이 아이였습니다.

    이곳 뿐만이 아니라 다른 그림 앞에서도 열심히 집중해서 그리고 있는 이 아이를 봤었거든요.

    살짝 파파라치샷을 찍어보기도 했는데요.  정말 그림을 좋아해서 따라 그려보고 있는 모습이 참 좋아보였습니다.

    이 그림의 색채가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국적활동분야출생지주요작품주요업적
    1840.11.14 ~ 1926.12.5
    프랑스
    회화
    프랑스 파리
    《정원의 여인들 Women in the Garden》(1866~1867), 《인상, 일출 Impression, Sunrise》(1872), 《생 라자르 역 Saint Lazare Train Station》(1877), 《건초더미(해질녁) Haystacks, (Sunset)》(1891), 《루앙 대성당, 서쪽 파사드, 햇빛 Rouen Cathedral, West Façade, Sunlight》(1894), 《수련 Water Lilies》(1906)
    인상파 양식의 창시자 중 한 사람

    본명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을 영국 해협의 항구 도시인 르 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을 만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외광묘사에 대한 기초적인 화법을 배웠다. 또한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대기 중의 빛을 포착해내는 기법을 익혔다. 훗날 모네는 용킨트를 가리켜 자신이 예술가의 눈을 키우도록 가르침을 베풀어준 진정한 거장이라 말하기도 했다.

    1859년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쉬스에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와 교우했다. 1860년 군대에 소집되어 1년간 알제리 주둔지에서 복무했으며, 1862년 장티푸스에 걸려 군에서 제대했다. 그는 곧 파리로 돌아와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 밑에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 등과 사귀며 공부했다. 이들의 우정은 새로운 생각과 열정이 반영된 미술운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1867년 그의 모델이며 애인이었던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가 그의 첫 아들 장(Jean)을 낳았다. 1869년 르누아르와 함께 파리에서 가까운 센 강변의 인기 있는 해수욕장 라 그루니에르에서 함께 작업했다. 1870년 카미유와 결혼했으며, 이어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런던에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Turner),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을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했다. 1873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으로 이뤄진 무명예술가협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다. 1874년 첫 번째 그룹전을 열어 《인상, 일출》을 출품했다. 이 전시를 관람한 비평가 루이 르로이(Louis Leroy)는 모네의 《인상, 일출》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모네는 이후 1886년까지 모두 8회 동안 이어진 인상파 전시에서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876년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에르네스트 오셰데(Ernest Hoschedé)와 그의 아내 알리스(AliceHoschedé)를 만나 그들 부부의 집을 장식할 작품을 의뢰받았다. 1878년 후원자인 오셰데가 경기 불황으로 은행파산 선고를 받고 벨기에로 사라져버렸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알리스는 여섯 자녀를 데리고 모네의 베퇴유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모네의 아내가 사망했고, 알리스와 모네는 연인이 되었다. 1883년 모네는 노르망디 지방의 지베르니로 이사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1892년 에르네스트가 사망하자 결혼했다.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다. 《건초더미》를 비롯해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은 대표적인 연작 작품이다. 모네는 연작을 통해 동일한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잘 표현해낼 수 있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은 빛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네의 능력에 감탄하면서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모네의 눈에는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빛의 변화가 느껴졌다. 때문에 그는 태양이 뜨고 질 때까지 캔버스를 바꿔가며 하나의 대상을 그렸다. 하루 종일 빛을 직접 보면서 작업하느라 시력이 크게 손상되었다.

    1893년 지베르니에 정원을 넓힐 수 있는 대지를 더 구매하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수련을 심고, 연못 위로 일본풍의 아치형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연못과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벽화작업에 착수했다. 《수련》연작은 모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자연에 대한 우주적인 시선을 보여준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이 그림들은 파리의 튈르리 정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거의 시력을 잃게 되었지만 그림 그리기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1926년 86세를 일기로 지베르니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에는 《카미유(녹색 옷을 입은 여인) Camille(The Woman in the Green Dress)》(1866), 《개양귀비 Wild Poppies》(1874), 《정원의 여인들 Women in the Garden》(1866~1867), 《인상, 일출 Impression, Sunrise》(1872), 《생 라자르 역 Saint Lazare TrainStation》(1877), 《건초더미(해질녁) Haystacks, (Sunset)》(1891), 《포플러 나무(가을) Poplars,(Autumn)》(1891), 《루앙 대성당, 서쪽 파사드, 햇빛 Rouen Cathedral, West Façade,Sunlight》(1894), 《수련 연못 위의 다리 Bridge over a Pond of Water Lilies》(1899), 《수련 Water Lilies》(1906)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여름 캠프로 미술관에 와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의 풍성한 경험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유럽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가지는 특권이겠지요?  그런데 저 아이들은 저 특권을 특권이라고 알고 있는 지 궁금합니다.^^

     

    피카소

    출생-사망국적활동분야출생지주요작품
    1881.10.25 ~ 1973.4.8
    스페인
    예술
    에스파냐 말라가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게르니카》(1937)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미술교사였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급학교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했고 졸업이 어려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저조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학교 규칙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다시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미술학교에 다녔지만 결과는 같았다. 17세 때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으며 이 무렵부터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려고 노력하였다. 

    1900년 그가 19세 때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였고, 다음 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합류하였다. 피카소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들의 작품을 접했으며 고갱의 원시주의, 고흐의 열정적 표현주의 등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세계적인 도시 파리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였으며 질병과 성병이 가득한 도시의 가난을 두려워하였다.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였으며 파리의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가난을 인내하며 지냈다. 하지만 당시의 요절한 화가들에 비하면 피카소는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20세에 첫 전시회를 열었고 그의 상황은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피카소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에 주목하여 거지와 가난한 가족 등을 그렸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를 피카소의 ‘청색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제작된 작품들은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또한 파리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지낸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비극적인 자살을 함으로써 그의 충격은 더했다. 1903년에 제작된 《인생》은 당시 피카소의 혼란스러웠던 감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연애를 하였고 그림의 색조가 청색에서 장밋빛 시대로 바뀌면서 색상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것이었다.

    1905년 피카소는 파리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다. 기욤 아폴리네르를 만났고 다음 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태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그의 대표작인《아비뇽의 처녀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이 비로소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조르쥬 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공동작업으로 입체주의 미술 양식을 창안하였다.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차례대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1915년 《볼라르상()》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를 소재로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 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 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바닷가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주제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y Picasso]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너무 좋은 작품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딱 하나만 소장할 수 있다면 선택하고 싶었던 작품은 이 기도하는 손이었습니다.

    어쩜 스케치가 이렇게 섬세하게 감정을 담아내고 있는지...

     

    저녁에 가본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이렇게 젊은이들의 클럽이 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푸트 트럭도 있고 음료도 팔고 아주 멋진 사교의 장이 되어 주고 있었습니다.

    비엔나의 밤거리도 정말 예쁜거 같아요.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닫아서 아쉽기는 했지만요.

    비엔나에 가신다면 알베르티나 미술관도 낮과 밤으로 꼭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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